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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스리랑카 현대사 05_평화협상과 선거 (1994 - 2004)

Peace Talks & Election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으며 인도평화유지군(IPKF)에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킨 JVP를 척결하고 IPKF의 철수에도 큰 역할을 한 쁘레머다써(Premadasa) 대통령이 1993LTTE의 자살 폭탄 테러에 의해 암살되면서 스리랑카 정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다

세계 최초 여성 수상인 Sirimavo Bandaranaike와 스리랑카 첫 여자 대통령인 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1994

주요 야당인 스리랑카 자유당(SLFP)[각주:1]를 포함한 야당 연합인 국민 연합(PA, People’s Alliance) 8월 총선에서 승리하였고 이어진 대통령 선거에서도 국민 연합의 대표인 찬드리카 반다러나이케 쿠마러뚱거(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 1945 - )[각주:2]가 승리하였다. 그녀는 17년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하였으며 스리랑카 첫 여자 대통령이 되었다. 그녀는 바로 그녀의 어머니이자 세계 최초 여성 수상인 반다러나이케 여사를 다시 수상 자리에 세웠다.

새로운 국민연합(PA)은 기존의 과격한 싱할라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색채를 버리고 시장 경제와 타밀과의 공존을 통한 국가 화합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이러한 노선아래 쿠마라뚱거 (Kumaratunga) 정부는 LTTE와의 평화협상을 재개했으나, 1995년 실패로 끝났다.

1999년  LTTE의 자살 폭탄 테러로 한쪽 눈을 잃은 꾸마라뚱거 대통령

1999년

6 Kumaratunga 대통령은 2000 8월까지 헌법 개정을 통해 연방국가로의 전환과 타밀족 다수 거주 8개 주에 대한 자치권 확대를 골자로 하는 내전 종식 계획을 발표하였다. 스리랑카 정치권 내에서 타밀, 무슬림 정당은 이러한 계획에 찬성하였으나 불교 성직자들과 불교계 정당(JHU)의 협상 반대입장이 확고하여 정부에 대한 규탄이 이어졌으며 자치가 아닌 완전 독립을 추구하는 LTTE 측의 강경한 태도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LTTE는 자신의 의사를 콜롬보를 향한 자살폭탄 테러로 보여주었는데 1999 12월 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두고 찬드리카 쿠마라뚱거 대통령이 자살 폭탄 테러의 대상이 되였다. 다행히 오른쪽 눈을 잃는 부상에 그쳤으며 선거에서도 승리하였다.

2000년부터 스리랑카에서 활동한 노르웨이 평화협상단의 Eric Solheim과 타밀 지도자 프라바카란

2001년 7월 LTTE의 자살 폭탄 테러로 파괴된 항공기 잔해

2000년 - 2001년    

민족간 갈등의 끝이 보이지 않는 스리랑카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1999년부터 내전 종식을 위한 노르웨이의 외교적 노력으로 Erik Solheim이 이끄는 노르웨이 평화협상단이 2월 정부와 LTTE을 평화협상 회담으로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10월 국민 연합(PA)의 국회의원 선거 승리 직후 수상이자 쿠라마뚱거 대통령의 어머니인 씨리마오 반다러나이케(Sirimavo Bandaranaike)가 운명을 달리하면서 국내 정치 문제로 평화협상이 늦어지게 되었고 꾸마러뚱거가 평화를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는 사이 다음 해인 2001년 4월 21일 LTTE는 평화회담을 취소하고 다시 정부에 대한 공세를 취하였다. 이러던 와중에 7월 스리랑카 국제공항에서 LTTE의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나 항공기 절반을 파괴되었다공항 폭탄 테러는 경제와 관광산업에 큰 타격을 입혔다

2002년       

곧이어 치러진 2001 12월 선거에서 짧은 국민연합(PA) 집권이 막을 내리고 라닐 위크러마싱허(Ranil Wickremasinghe, 1949 - )가 이끄는 UNP가 승리하였다. 신임 총리인 위크러마싱허 아래 연간 6%의 경제 성장을 보였으며 평화를 위한 노력이 재개되었다. 평화협상이 진전되어 2002 2월 22일 영구 정전협정(Cease Fire Agreement) 성립이라는 성과[각주:3]를 거뒀고 몇 차례 위반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무난히 준수됐다. 나아가 이 정전협정이 요구하는 신뢰구축조치들도 이행됐다. 북유럽 국가 요원으로 구성된 스리랑카 정전감시단이 창설돼 정전협정 위반사항을 조사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2002 4 LTTE 지도자 Prabhakaran 12년 만에 최초의 기자회견을 통해 타밀 독립이 아닌 자치 확대 용의를 제안했다. 이에 앞서 2001 12월 스리랑카 정부는 1998년 타밀 반군이 요구해왔던 LTTE 활동 금지령을 철회했다. 정전 혹은 종전에 대한 기대가 스리랑카 전역에 퍼져나갔으며 지난 몇 십 년간 닫혀있던 북쪽과 동쪽의 일부 지역이 마침내 일반 관광객에게 다시 개방되었다.

 

라닐 위크라마싱허, 여전히 UNP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2003년

종전에 대한 기대는 일 년이 채 지속되지 못하였다. 양측의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고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협상에 대한 환멸이 증가하였다. 더욱이 쿠마라뚱거 대통령과 그녀의 정당이 LTTE가 평화회담의 진행을 단순히 자신의 군대를 재정비하는데 이용한다고 강력히 비난하면서 평화협상에 임하는 LTTE의 동기에 대해 경계하였다.

결국 2003 4 LTTE는 협정에서 빠져 나왔으며 더욱이 2003년 후반 쿠마라뚱거 대통령과 야당인 UNP 소속 수상인 라닐 위크라마싱허 사이에 정치적 분열로 평화 협상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되었다. 서로 다른 정당 소속인 대통령 쿠마라뚱거 (국민연합, PA)와 국무총리 위크라마싱허 (국민연합당, UNP)는 오랜 정치적 경쟁관계로 서로를 견제하였으며 마침내 200311, 위크라마싱허가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에서 간 사이, 쿠마라뚱거는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위크러마싱하 수하에 있는 세 명의 장관을 해임하고 측근을 국방부 요직에 두도록 지시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면서 평화협상은 방향을 잃고 시간만 흘러갔.

한편 9.11 테러가 일어난 이후 테러무장단체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이 2003 10, LTTE FTO(Foreign Terrorist Organization, 외국테러단체)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조치가 내전 종식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내리는 부류와 오히려 LTTE를 고립시켜 긴장을 고조시키고 충돌을 격하게 만들었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상반된 주장이 제기되었다.[각주:4]

LTTE 시절 무라리타란 대령, LTTE와 결별 후 국가통합부 장관을 거쳐 현재는 SLFP 소속 국회의원이다.

2004년     

2004년 초, LTTE 지도층의 분열은 새로운 혼란을 가져왔다. 3 LTTE의 동부지역 작전사령관 카루나 무라리타란(Karuna Muralitharan, 1966 - ) 대령은 6,000명의 전투원과 함께 총사령관 프라바카란(Prabhakaran, 1954 - 2009)이 지휘하는 북부사령부와 결별하고, 스리랑카 정부에 대해 별도의 정전협정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LTTE 파벌간의 교전이 발생했고, 프라바카란 측이 승리해 동부지역까지 그 영향력을 확장했다. 그렇지만 카루나 분파사태는 반군의 전투원 규모 축소라는 의미 이상의 것을 남겼다. LTTE가 스리랑카 타밀 족의 유일한 대표라는 오랜 위상과 정통성에 심각한 타격을 줬으며, 분열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스리랑카 정부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패배한 카루나 대령은 후에 변절하여 정부군에 협력했으며 장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평화회담 진행이 불투명해지고 정치적 혼란이 지속되면서 정부는 사실상 무능력한 정부로 간주되었고, 4월 선거로 평화회담을 진행할 확실한 지도자를 내세운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길 기대했으나 선거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꾸마라퉁거 대통령은 JVP[각주:5]와 연합하여 UPFA (United People’s Freedom Alliance)라는 새로운 당을 만들어 총선에서 위크라마싱허와 UNP를 누르고 재집권에 성공하였다.[각주:6] 이 때, 남부에서 인기 있던 정치인인 마힌다 라자팍샤(Mahinda Rajapaksa, 1945 - )가 총리에 오르며 스리랑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다.

이러한 정세의 혼란 속에서 자살폭탄 테러가 콜롬보 지역에서 다시금 잇따라 발생했으며[각주:7] 결국 노르웨이 협상단은 9월 철수하게 된다. 그렇게 2004년 한 해가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to be continue…

(2012.06.20 1차 개정: 2000년, 2001년 그리고 2004년 자살폭탄 테러관련 내용 수정)



  1. 스리랑카 자유당(SLFP, Sri Lankan Freedom Party)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기치로 내걸었으며 싱할라어 공용어 제정으로 민족 갈등을 촉발시켰던 주요 정당이다. 현재대통령인 마힌다 라자팍샤(Mahinda Rajapaksa)가 이끄는 스리랑카의 여당으로 국회에서 103석(총 225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 UPFA (United People's Freedom Alliance)의 일원이다. SLFP의 정당 마크는 손바닥이다. [본문으로]
  2. 스리랑카 자유당(SLFP)의 설립자로 싱할라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켰던 반다러나이케(S.W.R.D. Bandaranaike) 수상과 그의 아내로 세계 첫 여성 수상인 씨리마오 반다러나이케(Sirimavo Bandaranaike) 수상의 딸이 바로 찬드리카 반다러나이케 쿠마러뚱거(Chandrika Bandaranaike Kumaratunga)이다. 가족 중 무려 세 사람이나 스리랑카를 이끄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세계 첫 수상이며 자신은 스리랑카 유일의 여성 대통령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이런 영광만큼이나 우여곡절과 비극을 가지고 있다. 반다러나이케 수상은 타밀과 화해의 노력을 시도하려다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하였으며, 쿠마러뚱거는 LTTE의 폭탄 테러로 부상을 입었고 영화 배우인 그녀의 남편은 암살당하였다. [본문으로]
  3. 자살폭탄테러 등 무장 공격 일변도의 극단적인 활동으로 LTTE가 자신들의 지지기반인 타밀인들로부터 서서히 지지를 잃어 가고 있는 동안 양쪽 모두 극도로 전쟁에 지쳐있었다. 뿐만 아니라 “테러와의 전쟁”을 주도한 미국의 위협으로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로부터 테러 집단으로 간주된 LTTE에 대한 국제적인 지원이 끊어지는 시점에서 위끄러머씽허의 회유적인 접근 또한 중요한 요소였다. 이후 평화 협상 및 회담이 지속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LTTE가 자신의 가장 주요한 원칙이었던 완전한 자주 독립을 포기하고, 연방제를 선택하였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스리랑카내의 타밀 지역에 의회와 수상 그리고 군대까지 자치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게 되었다.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스리랑카 정부의 LRRP(Long Range Reconnaissance Patrol, 장거리정찰부대)가 LTTE의 주요 지휘관 몇명을 제거하여 이들의 지휘체계에 혼선을 가져와 전투 수행에 큰 타격을 입어서 라고 보고 있다. [본문으로]
  4. 이 후, 미국은 스리랑카 정부에 대한 실질적이고 광범위한 직접원조를 제공했으며, 스리랑카 정부군의 전력 강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를 계기로 정부군의 군사력이 반군을 압도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는 LTTE의 해외자금 조달환경을 어렵게 만들었다. 조직 운영을 위한 자금의 많은 부분을 미국, 캐나다, 영구 등지의 타밀 해외조직에서 지원을 받던 LTTE의 조직 운영 및 무기 조달을 차단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본문으로]
  5. 두 차례 무장폭동으로 수 많은 시민이 살해하였으며 민족간 갈등을 부축인 민족해방전선(JVP)은과 꾸마라뚱거 대통령의 남편으로 배우 출신인 위저여 꾸마라뚱거를 살해하기도 하였다. 민족해방전선과 꾸마라뚱거 대통령의 연합은 재집권에 대한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작용한 것이다. [본문으로]
  6. 서구적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며 스리랑카 경제 회복을 위해 타밀 반군과의 협상에 개방적인 입장을 취한 UNP가 이 선거에서 패배한 것은 LTTE와의 평화협상에서 정부가 지나치게 양보하고 있다는 유권자들의 인식이 작용한 것으로 평가됐다. [본문으로]
  7. 2004년 하반기 몇 번의 자살폭탄 테러와 암살이 자행되었으나 그 주체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상태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