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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스리랑카 현대사 02_민족 갈등의 시작 (1956 - 1976)


The Roots of Tamil Opposition

고대
기원전 15세기부터 인도와 스리랑카 사이에는 왕래가 있었으며 (주로 북 인도인들의 이주 행렬) 기원전 3세기부터 타밀의 이주가 이루어졌다. BC 246년 불교를 받아들인 후,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군대 양성에 소극적이었던 스리랑카 왕조는 주로 타밀인들을 용병으로 사용하면서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5, 6세기에는 남인도 힌두 타밀 제국이 불교 싱할라 통치자들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으며 14세기 초 번성했던 폴론나루와(Polonnaruwa) 왕권이 쇠퇴하면서 스리랑카 북쪽 지역인 자프나(Jaffna)에 처음으로 타밀 왕조인 자프나빠트남(Jaffnapatnam)가 세워졌다. 이처럼 싱할라왕조의 북쪽 수도가 쇠퇴하고 남쪽으로의 이주가 계속되면서 북쪽 해변가에 거주하는 타밀인들과 남쪽 혹은 섬 안쪽에 거주하는 싱할라인들 사이에 열대밀림이 자연적인 완충지로의 역할을 하였으며 자연스레 오랜 기간 동안 자프나 지역은 인도 남부 왕조의영향을 받았다. 싱할라족과 타밀족은 오랜 기간에 걸쳐 서로 교류하면서도 경쟁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


좌: 폴로나루와, 우: 자프나

근대
이러한 양상은 포르투칼을 시작으로 네덜란드와 영국 등 유럽의 식민지배가 이어지면서 바뀌었다. 식민지배를 받는 동안 많은 수의 타밀 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두 문화가 서로 한데 섞여 혼합되었다. 특히 영국인들이 1843년부터1859년까지 플랜테이션 사업을 위해 타밀 노동자들을 데리고 오면서 스리랑카의 인종 분포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들은 지리적, 역사적, 계급적으로자프나 타밀과도 확연히 구분되었다. 근대 싱할라인들과 타밀인들 간의 갈등은 영국 식민지 시절 시작되었다. 영국인 관리인들은 식민 지배를 하기 위해 영어가 가능하며, 지식을갖춘 타밀인들을 중용하면서 교육과 공무 수행 분야에서 우월적 지위를 누렸다. 싱할라족은 이러한 영국의 타밀 우대 정책에 대해 분개하였으며 싱할라인들의 박탈감은 1948년 독립을 맞으면서 반타밀정서로 발전되었다.

인도에서 강제로 이주된 플랜테이션 타밀, Plantation Tamil
http://lankapura.com/2009/11/the-plantation-tamils-of-ceylon/  
 
현대 
경제가 침체되어 있던 1950년 중반부터 본격적인 현대의 싱할라-타밀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복지, 일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경쟁하면서 서로 시기와 질투하였다. 특히 싱할라 주요 정당들은 타밀인들의 동맹국가인 인도에 의해 자신들의 종교, 언어, 문화가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였으며 소수 민족인 타밀인들은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자신들의 거주지역이며 지지기반인 북쪽과 동쪽 지역에 대한 자치권을 행사하고자 연방제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1956년-
UNP[각주:1]는 총선에서 스리랑카 자유당(SLFP, Sri Lankan Freedom Party)[각주:2]의 지도자인 반다러나이케(S.W.R.D. Bandaranaike, 1899-1959)[각주:3]에게 패배하고 정권을 넘겨주었다. 새로운 정부와 지도자는 즉시 나라의 정치적인 분위기들을 바꾸어갔고 가장 먼저 싱할라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제정하였다. 이를 통해 영국 식민지가 남기고 간 기독교 문화에 대항하여 불교와 싱할라 문화 발전을 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새로운 정책은 불행하게도 인종과 종교 간 충돌과 갈등을 유발시켰다. 영국 식민지 잔존세력의 반대와 함께 북쪽과 동쪽에 주로 거주하는 타밀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는 식민지에서 벗어난 후 서서히 지속되어온 싱할라와 타밀 간 충돌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좌: 반다러나이케(S.W.R.D. Bandaranaike)
우: 콜롬보에 위치한 반다러나이케 기념국제관(BMICH, Bandaranaike Memorial International Conference Hall)
 
1959년
갈등이 격해지자 그(Bandaranaike)는 이러한 상황을 풀어나가고자 타밀 지도자들과 연방제를 논의하는 등 대화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행동은 싱할라와 타밀 양측의 극단주의자들을 자극하였고 결국 1959년, 불교 승려에게 암살 당하며 짧은 통치를 마감하였다. 

1960년-
반다러나이케의 미망인 씨리마오 반다러나이케(
Sirimavo Bandaranaike, 1916-2000)가 동정적 여론에 힘입어 수상의 자리를 이었으며 이로써 그녀는 세계에서 최초의 여성 수상이 되었다. 반다러나이케 여사 정부는 계속적으로 싱할라 민족주의(Sinhala Only Act)를 위한 정책들을 이행해갔다. 사립학교들은 기독교적 색채를 없애기 위해 국유화 되었으며[각주:4] 중요 산업들도 국유화 되었다.[각주:5] 뿐만 아니라 300만 명의 스리랑카 국적 타밀인들의 거주를 인정해주는 대신에 인도 국적의 50만 차밭 노동자들을 인도로 추방하였다.[각주:6] 세계 최종 여자 수상이라는 상징성 덕분에 해외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느나, 이러한 강경한 정책들로 인해 국내에서는 민족 갈등 강화와 쿠테타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971
혼란스러운 정세와 어두운 경제 전망으로 나라에 불만을 품은 젊은 학생, 청년들이 인민해방전선(JVP, Janata Vimuktu Peramuna, People’s Liberation Party)[각주:7] 를 주축으로 무장 폭동을 일으켜 정부 기관을 향한 폭탄 테러를 자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3월 16일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진압에 들어갔으며 대부분 어린 학생들로 구성된 조직이어서 곧 군에 제압 당하였으나 이러한 과정에서 25,000 여명이 사망하였다. 


좌: 타밀 호랑이를 세운 프라바커란(Velupillai Prabhakaran), 우: 최초의 여성 수상 반다러나이케 여사(Sirimavo Bandaranaike)


1972년 
5월 20일 신헌법 공포를 통해 총독제를 폐지하며 영연방자치국인 실론(Ceylon)에서 새로운 독립공화국으로 출범하였다. 국명도 스리랑카 공화국(Republic of Sri Lanka)으로 개칭하며 식민지 잔재 청산과 독립국으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싱할라인들과 타밀인들간의 물리적 충돌은 1970년대 초반에 개정된 두 개의 법률에서 시작되었다. 1970년에 통과된 첫 번째 법률은 대학에서 식민지 시절부터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고하고 있는 타밀인들의 숫자를 제한하는 것으로 고등교육을 받던 타밀인들이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두 번째로 1971년 헌법 개정을 통해 불교를 국교로 제정하였으며 정부는 불교를 보호하고 육성할 의무를 지니도록 하였으며 싱할라어를 국어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부의 지침은 섬의 북동쪽에 주로 거주하며 힌두교를 믿는 타밀 사회의 분리와 이들과의 갈등을 조장하였다. 

이로 인해 북부 타밀 사회에서 불안감이 가중되었고 1971년부터 북쪽 지역은 몇 년동안 소요사태가 지속된다. 스리랑카 정부는 비상사태(1971.3-1977.2)를 선포하고 경찰과 군을 동원하여 타밀 인들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여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반감이 가중되면서 1970년 중반부터 싱할라 인들로 부터의 차별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으로 무장 투쟁이 대두되었고 젊은 타밀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엘람(Eelam, 소중한 땅)이라 불리는 타밀 주의 독립의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한 그룹이 프라바카란(Velupillai Prabhakaran, 1954-2009)이 만들었으며 흔히 타밀 호랑이라 불리는 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혹은 Tamil Tigers) 였다. 1970년 후반과 1980년 초반을 거치면서 LTTE가 가장 강력한 무장 단체로서 타밀 독립 투쟁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으며 체계적으로 스리랑카 정부 목표물을 공격하기 시잭했다점차 타밀인들과 군의 충돌이 그 규모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전쟁의 검은 그림자가 스리랑카에 드리워졌다.

to be continue 

(2012.09.19 1차 개정: 1960년대 내용 추가,오탈자 수정)


  1. 스리랑카의 초대 수상인 쎄나나여케(D.S. Senanayake)가 1952년 콜롬보 골 페이스 그린에서 말에 떨어져 죽자 그의 아들 두들리 쎄나나여케(Dudley Senanayake)가 뒤를 이었다. 그(Dudley Senanayake)는 치솢는 물가상승과 실업 등 악화되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잘못된 정책으로 나라 전체에 폭동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나서야 진정되었으며 이에 대한 책임으로 사임하였다. 1953년에는 그의 삼촌 존 꼬뗄러월러(John Kotelawala)가 그의 뒤를 이었다. [본문으로]
  2. 스리랑카 자유당(SLFP, Sri Lankan Freedom Party)은 현재대통령인 마힌다 라자팍샤(Mahinda Rajapaksa)가 이끄는 스리랑카의 여당으로 국회에서 103석(총 225석)을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 UPFA (United People's Freedom Alliance)의 일원이다. SLFP는 싱할라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며 손바닥이 정당 마크이다. [본문으로]
  3. 스리랑카 자유당(SLFP)를 결성하였으며 싱할라 민족주의를 실현한 반다라나이케(S.W.R.D. Bandaranaike)는 캔디 왕조의 귀족 출신이다. 그는 영국 옥스포트 대학교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싱할라족과 불교에 대한 전통을 가진 캔디 귀족이라는 정체성과 서양식 사고방식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옥스포드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며 서양의 옷과 기독교를 벗어 던지겠다고 선언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선언이 SLFP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싱할라 민족주의로 민족간 갈등을 유발하였다는 큰 실수에도 불구하고 현재 많은 국민들에게 기득권이 통치하던 정부를 일반 국민에게로 가져온 국민적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본문으로]
  4. 기독교 재단이 세운 갈레(Galle)에 있는 리치몬드 컬리지(Richimond College)도 이 시기에 불교 학교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62년 'Ceylon화 정책'이라는 일련의 국유화 조치를 통하여 미국, 영국계 석유회사를 접수하였으며 유력지 ANC 그룹(Associated Newspapers of Ceylon Ltd)의 국영화를 강행하여 국민의 대정부 불신감이 고조되었다. [본문으로]
  6. 노예 무역을 통해 강제로 이주되어 무적 상태로 살던 인도 국적의 차밭 노동자들을 본국으로 돌려 보냄으로 그들의 국적을 회복시켜준 의미있는 결정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본문으로]
  7. 인민해방전선(JVP, Janata Vimuktu Peramuna, People’s Liberation Party)는 싱할라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가치로 내걸고 1965년 설립된 정당이다. 1971년과 1987년 각각 SLFP와 UNP에 대항하여 무장 폭동을 일으킨 극단적인 좌익 정당으로 1989년에는 정당 정치에 합류하였다. 싱할라 민족주의적 여론에 힘입어 크게 성장하였으며 현재는 현 대통령인 라자팍샤(Mahinda Rajapaksa)를 지원하는 주요 단체의 하나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