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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스리랑카 현대사 03_새로운 경제 정책과 내전 발발 (1977 - 1988)


Paralysis Follows Economic Growth & Civil War

대학에서 타밀인 제한과 불교의 국교화를 위한 헌법 개정, 경제 및 산업의 국유화 정책 등으로 혼란스러운 정세와 어두운 경제 전망이 이어지며 세계 첫 여성 수상이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는 씨리마오 반다러나이케(Sirimavo Bandaranaike)가 이끄는 스리랑카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JVP의 폭동이 일어났고 북부 지역에서는 소요사태가 지속되었다. 스리랑카의 경제는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1977년 실업률이 50%까지 상승했다. 결국 그녀는 야당뿐만 아니라 연립여당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하는 수상이 되었고 정권교체의 요구에 직면하였다.

정권교체에 성공한 자여와르데네(J.R. Jayawardene)

1977년 - 정권교체
그 해 6월, 반다러나이케가 이끄는 연립전선(United Front)를 누르고 UNP를 이끄는 자여와르데네(J.R. Jayawardene, 1906-1996)가 새로운 수상이 되었다. 그는 사회주의 노선을 걷던 반라더나이케 여사와는 정반대의 경제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개방경제를 표방하는 싱가포르를 따라가고자 다시 사기업을 회복시키고 외국으로부터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이러한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1983년 실업률을 절반으로 줄였으며 1985년에는 쌀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중동으로 일하던 간 노동자와 외국 관광객들로부터 외화를 벌어들였다. 경제적 노력과 함께 민족 갈등을 해소하고자 타밀어와 영어를 국가언어(national language)로 승격시켰다.

1978년 - 대통령제
개방을 표방한 경제 정책처럼 정치적으로도 민주적이고 개방적이지는 않았다. 자여와르데네는 수상이 된 직후부터 대통령제를 준비하여 조금은 이상한 절차로 1978년 개헌과 함께 스리랑카의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각주:1] 자신의 첫 임기가 끝나갈 무렵인 1982년, 세 번째 개헌을 단행하였다. 이를 통해 4년간의 첫 임기 후에 대통령은 선거를 언제든지 열 수 있도록 하였으며 국회에서 많은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여당인 UNP에게 유리하게 만들고자 1983년 총선을 대신하여 국민투표를 통해 자신의 임기를 연장시켰다.

1981년 북부지역 소요사태로 불타버린 자프나 공립 도서관

1983년 
경제적인 성공과 타밀어의 국가언어 지정과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야와르데네는 민족갈등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으며 전 수상인 반다러나이케 여사와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1971년부터 지속된 북부지역의 소요사태 해결을 위해 1979년 경찰에게 체포와 구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테러저지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1983년 7월 11일 연설에서는, “만약에 내가 타밀인들을 굶주리게 만들어 항복시킨다면 싱할라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다(Really if I starve the Tamils out, the Sinhala people will be happy.[각주:2])"와 같은 발언으로 정부에 대한 타밀인들의 환멸을 증가시켰다.


1, 2: 콜롬보 보렐라(Borella) 지역에서 타밀인들을 공격하는 싱할라인들
3: 1983년 7월 23일 LTTE의 무장공격으로 살해당한 군인의 시신을 운반하기 위한 준비 모습

1983년 7월 - 내전 발발
같은 해 7월 23일 자프나(Jaffna)지역에서 LTTE(타밀 호랑이)들이 매복하고 있다가 군 순찰대 13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내전이 발발하였으며 몇 주 후, 이에 격분한 싱할라 군중들은 스리랑카 전역에서 타밀인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검은 7월(Black July)’이라고 불리는 이 기간에 최대 2,000명 정도의 타밀 사람이 살해되었다.[각주:3] 정부, 경찰, 군인들은 폭동을 수수방관하였고 ‘검은 7월’을 겪으면서 싱할라 족과 타밀 족은 서로 건너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수만 명의 타밀 사람들이 북쪽 지역으로 피난 가거나 해외로 떠났으며 반대로 싱할러 사람들은 자프나나 다른 타밀 지역을 떠나 서남부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스리랑카 군과 LTTE 사이에 전선이 생성되었다.

1984년 - 1985년          
이 기간 중 LTTE는 두 차례의 대규모 싱할라족 민간인 학살을 단행하며 내전은 잔인한 살해와 학살로 격화되었다. 타밀족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스리랑카 북부 자프나 반도를 비롯해 동부 일대에서 반군의 게릴라전에 대응하는 정부군의 대규모 소탕 작전이 벌어지는 등 치열한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양측이 보유한 무장력을 총동원하는 강도 높은 재래식 전쟁으로서, 전선이 불분명하고 특히 민간 피해가 많이 발생하는 분쟁 양상을 보였다. 그 해 폭동은 계속적으로 증가했고 대량학살은 지속되었다. 1985년 5월 싱할러와 불교 문화의 상징적 중심지 아누라더뿌러에서는 150명의 싱할러 사람들이 총살되기도 했다. 전쟁은 나라의 경제, 관광업을 어렵게 했고, 홍차 사업 역시 하락세를 보였다.


좌: 자프나에 도착한 인도 평화유지군, 우: 인도 평화유지군 파견에 합의하는 인도 Rajiv Gandhi 총리와 Jayawardene 대통령
 
1987년 - 인도 평화유지군 파견
정부는 LTTE를 자프나로 돌아가도록 압박하며 타밀 반군의 무장해제와 북동쪽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였고 6월 양측간에 정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소강 국면으로 전환됐다. 그리고 7월 스리랑카 정부(Jayawardene 대통령)는 인도 정부(Rajiv Gandhi 총리)와 협상에 들어가서 평화유지군(IPKF, Indian Peace Keeping Force) 파견에 합의하였다. 이러는 동안 스리랑카 정부는 북동쪽을 관할하는 자치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통해 하나의 지방의회(Provincial Council)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타밀 반군의 무장해제와 북동부 지역의 평화 유지를 목적으로 파견된 인도 평화유지군은 타밀, 싱할라 양쪽 모두에게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초기에 LTTE는 평화유지군에 호의적인 입장이었으나 인도가 다른 타밀 반군 세력을 지원하고 자신들을 고립시키려 하자 크게 반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도인들이 북쪽지역을 자신들의 주권지역처럼 다루면서 젊은 싱할라 청년들을 자극하는 존재가 되었다.


좌: 인도 평화유지군 반대 시위, 우: 대학생들의 시위

1987년 - 1988년
이에 힘을 받은 민중해방전선(JVP)[각주:4]는 정치적 살인과 파업으로 두 번째 혁명을 조직하였다. 16년 전인 1971 반란의 실패를 거울삼아 위제위러(Rohana Wijeweer)의 지도아래 학생, 승려, 실업자, 경찰, 군 등으로 빈틈없이 조직되어 폭동을 전개하였다. LTTE의 테러와 JVP의 폭동, 인도 평화유지군의 유명무실화로 나라는 혼란스러웠으며 경제는 불구가 되어 나라 전체가 마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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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정책이라는 새로운 경제 정책으로 경제 성장을 이끌며 순조롭게 출발했던 자야와르데네 대통령 정부의 노력은 내전으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평화 진작을 위한 인도 평화유지군 파견 조치는 오히려 타밀과 싱할라 족의 갈등만 부추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자야와르데네 대통령을 뒤이어 스리랑카를 이끌어갈 라너싱허 프레머다써(Ranasinghe Premadasa,1924-1993)는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갈까. 험난한 내전의 역사는 이제 시작이다. 

to be continue



  1. 1972년 반다러나이케 여사의 헌법을 개정하여 행정부 대통령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선거 없이 1978년 2월 4일 스리랑카의 첫 대통령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31일 두 번째 개헌을 통해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력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스리랑카의 국회를 콜롬보에서 스리자여와라다나푸라 코테(Sri Jayawardanapura Kotte)로 옮겼다. [본문으로]
  2.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Junius_Richard_Jayewardene [본문으로]
  3. 스리랑카 정부군을 향한 LTTE의 첫 대형 테러로 촉발되어 피로 얼룩진 1983년 7월을 ‘검은 7월(Black July)’이라 부른다. 콜롬보에서는 성난 시민들이 타밀 가구를 정확히 찾기 위해 선거인 명부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타밀 거리가 있는 뻬따(Pettah) 지역에서 피해가 심했다. [본문으로]
  4. JVP(Janata Vimuktu Peramuna, People’s Liberation Party)는 싱할라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가치로 내걸고 1965년 설립된 정당이다. 1971년과 1987년 각각 SLFP와 UNP에 대항하여 무장 폭동을 일으킨 극단적인 좌익 정당으로 1989년에는 국회에 진출하였다. 반국가적 폭동에도 불구하고 싱할라 민족주의적 여론에 힘입어 크게 성장하였으며 현재는 현 대통령인 라자팍샤(Mahinda Rajapaksa)를 지원하는 주요 단체의 하나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