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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스리랑카 현대사 04_인도 평화유지군과 자살폭탄테러 (1989 - 1993)


Indian Peace Keeping Force & Suicide Bombing



싱가포르를 표방한 자야와르데네 대통령의 개방정책으로 스리랑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나 이내 LTTE의 정부군에 대한 첫 대형 공격으로 1983년 내전이 시작되면서 이러한 노력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싱할라 사람들의 폭동이 이어졌으며 스리랑카의 평화를 위해 인도와 협의하여 파견한 "인도 평화유지군"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라너싱허 프레머다써(Ranasinghe Premadasa,1924-1993),
스리랑카 제 2대 대통령, 인도평화유지군 철수에 힘썼으며 LTTE의 폭탄 테러 공격에 생을 마감한다. 



위제위러(Rohana Wijeweera, 1943-1989),
스리랑카 사회주의 정치인으로 민중해방전선(JVP)를 설립하여 두 차례의 무장 폭동을 일으킨다.

1989년 - 새로운 대통령
1월 자여와르데네(Jayawardene) 대통령을 이어 같은 당인 UNP의 라너싱허 프레머다써(Ranasinghe Premadasa,1924-1993)가 정권을 잡았다. 콜롬보의 달동네 판자촌에서 태어난 프레마다써는 경제에 활기를 되찾고, 전쟁을 끝내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먼저 평화유지군 파병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민중해방전선(JVP)의 무장해제를 촉구하였으며 이러한 권고가 거절당하자 군대를 보내 민중해방전선(JVP)를 척결하기 위한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치열한 지하전이 벌어졌으며 1989년 11월 지도자인 위제위러(Rohana Wijeweera)를 제거할 때까지 JVP의 지도자들을 한 명 한 명 제거해 나갔다. 1989년 말 대부분의 민중해방전선(JVP) 리더들이 살해되거나 감옥에 갔으며 폭동으로 살해당한 사람(대부분이 청년)은 17,000명에 다다랐다.

싱할라 민족주의 단체인 JVP는 두 번의 반정부 폭동으로 수많은 시민의 목숨을 앗아간 잘못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고 그 명맥을 이어갔으며 다시 세를 불려 현 대통령인 마힌다 라자퍅샤(Mahinda Rajapaksa)를 지원하는 주요 단체로 성장하였다.

1990년 - IPKF 철수
JVP를 진압한 프레머다써는 다음으로 그 역할을 상실한 인도 평화유지군 IPKF[각주:1]의 철수를 요구하였으며 3월 인도 평화유지군은 아무런 성과 없이 상처만 입고 스리랑카를 떠났다. 3년 간 LTTE와의 전쟁에서 많은 패배를 경험하였으며 2,500여명의 사상자(1000여명 사망)를 낸 채 그들은 인도로 철수하였다.

LTTE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인도 군대의 공격에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자신감에 인도평화유지군이 스리랑카를 떠나자 LTTE는 스리랑카 정부에 대한 적대감을 다시 갖게 되었다. 6월 Premadasa 대통령 정부와 LTTE간의 평화협상으로 일시 휴전이 성립되기도 했으나, 무장충돌은 전투, 폭동, 암살, 테러 등의 다양한 형태로 지속되며 다시 점차 확대되었다. 1990년 말에는 LTTE가 자프나를 포함한 북쪽 지역을 손에 넣었으며 동부는 정부가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LTTE와 무슬림의 충돌이 발생하여 모스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던 116명의 무슬림 사람들이 죽었다. 



LTTE가 북동부 지역 회복을 위한 공격을 감행하면서 바티칼로아(Batticoloa) 지역의 모스크에서 일어난 참변 (1990. 08. 03)
http://pact.lk/timeline/page/17/  

1991년 - 1993년
악화일로를 걷던 내전에 자살폭탄 테러[각주:2]가 전면적으로 등장하였다. 전선이 동북부에 위치하여 상대적으로 전쟁의 영향에서 안전했던 중부 지역까지 피해를 입게 되었다. 1991년, 인도 평화유지군인 IPKF 파견을 지시했던 전 인도 총리 Rajiv Gandhi가 인도 타밀 나두 지역에서 암살되었으며 1993년에는 스리랑카의 대통령 Pramadasa가 콜롬보에서 자살 폭탄 테러로 또 다른 희생자가 되었다. 잇따라 국가 지도자가 암살 당하는 대형 사고가 이어지며 LTTE는 자신들의 존재를 전세계에 알렸다. 이를 계기로 둘 간의 전쟁의 전례 없이 잔인한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많은 수의 타밀인들과 싱할라인들은 평화를 바랬지만 전쟁은 격해져만 갔다.



인도 평화유지군 파병 협정에 서명한 인도 전총리 라지브 간디 폭탄 테러 현장 (1991. 05. 31)
http://www.outlookindia.com/printarticle.aspx?228400  

스리랑카에 평화는 요원해보인다.


to be continue 


 

  1. 인도 평화유지군(Indian Peace Keeping Force) 파병은 싱할라, 타밀 모두에게 큰 논란 거리였다. 싱할라 민족주의자들은 평화유지군을 침략자로 간주하였으며, LTTE는 북쪽에서 성장하고 있는 자신들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보았다. 이러한 국민적 반감 때문인지 IPKF는 평화 유지라는 그들의 목표를 성취하지 못하였다. 북쪽 지역에서 LTTE와 지속적으로 충돌하였으며 패전을 거듭하였다. 이처럼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자 3년 만에 철수라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본문으로]
  2. 테러 공격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1990년 국방부 장관인 위저라튼 암살을 이후로 인도 전총리 간디(1991.5), 프레마사다 대통령(1993.5), 콜롬보 중앙은행(1996), 캔디 불치사(1998), 꾸마러뚱거 대통령(1999), 콜롬보 국제공항(2000)에 이르기 까지 그 대상과 범위가 상상을 초월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