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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스리랑카 현대사 01_민족주의 움직임과 독립 (1900 - 1955)

Nationalism and Independence
20세기의 시작은 스리랑카 민족주의 운동에 중요한 시기였다. 1505년부터 이어진 약 440년간의 근세 식민시대를 거치면서 신경제제도의 채택과 영어 공용어화 교육등 서구 문화의 영향으로 19세기 전반에 스리랑카 전통은 극히 약화되었다. 하지만 19세기가 끝나가면서 서구 문화에 맞서고 기독교의 영향으로부터 자문화를 지키며 유럽 식민지의 잔재에서 벗어나기 위한 불교와 흰두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움직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불교 부흥 운동은 데이비드 레와위타라네(David Hewavitharane, 1864-1933)의 주도하에 전개되었다. 그는 '달마를 지키는 방랑자'라는 의미를 지닌 아나가리카 다르마파라(Anagarika Dharmapala)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싱할라 불교 민족주의와 프로테스탄트 불교의 확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의 활동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각주:1]의 창립자이며 후에 스리랑카 불교의 부흥 운동가로 명성을 떨친 헨리 스틸 올코드(Henry Steel Olcott, 1832-1907)의 후원이었다. 이런 민족주의적 인식이 확산되면서 정치적인 영역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좌: 아나가리카 다르마파라(Anagarika Dharmapala), 우: 헨리 스틸 올코드(Henry Steel Olcott)

1910년
불교와 흰두교 부흥 운동을 이끄는 종교 지도자들은 스리랑카 정부에 시미들이 더 많은 참여를 할 수 있도록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1910년 새로운 헌법 개정으로 인해 소수의 교육받은 스리랑카 인들이 한 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뻬따(Pettah, 수도인 콜롬보의 시장) 좌: 1910년, 우: 2011년
http://www.imagesofceylon.com/  

1915년-1919년
세계 1차 대전 중이던 1915년 영국인들은 콜롬보에서 무슬림 상인들에 대한 시위를 일으킨 시민들의 지도자인 데이비드 레와위타라네(David Hewavitharane)을포함한 불교 부흥 운동의 지도자들을 투옥시켰다. 이러한 계엄 조치는 싱할라인들을 자극시켜 이에대한 분노가 널리 퍼지게 되었고, 1919년 싱할라와 타밀인들로 구성된 실론 국민당(Ceylon National Congress) 설립을 자초하였다. 비록 이를 주도한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 데이비드 레와위타라네와 동일 인물)은 추방되었으나 싱할라, 타밀 인종을 가리지 않고 젊은 사람들이 대거 실론 국민당에 참여하여 불평등을 없애기 위한 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졌다.

1927년
간디(MahatmaGandhi)가 타밀 젊은 운동가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자프나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1931년
19세기 말부터 지속된 민족주의 운동으로 마침내 스리랑카 지도자들이 정치적인 권력뿐만 아니라 국회의 의사 결정 과정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도나우모어 (Donoughmore) 헌법이 공표되었다. 게다가 새로운 헌법은 21세 이상의 여성들에게도 참정권을 주는 보편적인 선거권도 보장하였는데 이는 아시아 국가 중 최초이다[각주:2]. 이 헌법은 약 3년에 걸쳐 준비되었으며 4개월 동안 스리랑카 주민들과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목소리를 키워가는 스리랑카 민족주의 움직임은 1939년 발발한 세계 2차 대전 중에도 완전 독립을 위한 노력으로 계속되었다. 하지만
싱가폴, 인도네시아, 미얀마가 잇따라 일본에게 패배하자 스리랑카는 자신들이 전쟁의 동부전선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영국의 전쟁을 지원하며 독립에 대한 의지를 의심케 했다. 1942년 말 스리랑카는 아시아에서 영국의 주요한 전략적 기지가 되고 말았다.  

1948년
이런 와중에 194
7년 인도가 독립하면서 1948년 2월 4일에 실론(Ceylon)[각주:3]도 독립을 맞았으며 이들의 독립 과정은 식민주의에 대한 대중적 투쟁을 거치지 않고 독립을 얻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립하는 과정에서 싱할라, 타밀, 무슬림등 각 민족을 대표하는 정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사용하는 엘리트 집단인 통일국민당(UNP, United National Party)[각주:4] 가 세력을 장악하였다

실론의 독립에 서명하는 영국측 대표인 Henry Monck-Mason Moore와 초대 수상인 D.S. Senanayake

독립할 당시만 해도 국가 사정이 좋았다. 영국군의 서남아시아 기지 역할을 하면서 일자리가 넘쳐났고  전쟁으로 고무 수요가 이어져 경제에 활력이 넘쳤다. 뿐만 아니라 영국군은 스리랑카에 주둔하고 있는 동안 모기를 제거하기 위한 갖가지 노력을 펼친 끝에 아시아에서 말라리아를 제거한 첫 번째 나라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서양 엘리트들의 관점과 사고를 가진 
여당 UNP 지도자들의 이데올로기가 스리랑카에 적합하지 않아 문제가 생겨났으며 게다가 전쟁으로 인한 경제 호황이 오래지속되지 못하였다. 세계 시장에서 고무, 차 가격이 폭락하고 수입하던 식량의 가격이 상승하면서 실업률도 급격히 증가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져왔다. 그러는 동안 UNP의 지도자인 세나나야케(D.S.Sennanayake, 1884-1952)는 수세대에 거쳐 스리랑카에 살았지만 영국에 의해 강제로 이주되어 인도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차밭 타밀 노동자들을 외국인으로 규정하고 본국인 인도로의 송환을 주장하여 민족, 인족간의 갈등을 조장하였다. 

싱할라족인 국가 지도자의 이러한 주장은 민족간의 갈등을 조장하였으며 
불행하고 참혹했던 싱할라족과 타밀족 간의 갈등이 스리랑카 현대사에 그 모습을 들어내는 순간이다.


to be continue

(2012.09.19 1차 개정: 독립 전후 사정 보완, 오탈자 수정, UNP 한글 명치 통일국민당으로 변경 및 내용 보완)



  1. 1875년에 미국에서 신비주의적 종교관을 바탕으로 창설되어 주로 인도에서 활동하는 국제적 종교단체로 신지학회 혹은 신지학협회라고 한다. 신비주의 종교철학인 신지학 (神智學)은 고대부터 있어 왔는데, 근대에 들어 신지학이 융성해진 것은 러시아 귀족 출신 여성인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 (Helena Petrovna Blavatsky)에 의해서였다. 블라바츠키는 1875년에 미국에서 헨리 스틸 올콧 (Henry Steel Olcott) 대령과 함께 신지학 교리에 바탕을 두고 모든 종교의 융합과 통일을 목표로, 신지학회를 창설했다. [본문으로]
  2. 대한민국 1948년, 일본 1945년, 중국 1949년, 인도 1950년 등에 비해 보편적 선거권을 일찍 쟁취하였다. http://en.wikipedia.org/wiki/Timeline_of_women's_suffrage [본문으로]
  3. 실론(Ceylon, 1948.2-1972.5)은 영연방내 자치국으로 출범하였다. 영국 국왕을 국가 원수로 하고 현지인 총독을 두어 국가원수의 권한을 대행케 하되, 내각의 수반인 수상이 실권을 행사하는 영국식 내각책임제를 채택하였다. [본문으로]
  4. 통일국민당 (UNP, United National Party)은 SLFAP와 함께 스리랑카의 대표 정당으로 현재는 42석(총 225석)을 차지하며 제1야당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식민지 시대에 영어로 교육받은 상류층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되었으며 온건 싱할라, 불교도, 우파 온건 회교도 등을 지지 기반으로 한다. 이들은 서구적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고 있다. 녹색 코끼리가 정당 마크이며 2005년 대선에서 현 대통령인 미한다 라자팍샤(Mahinda Rajapaksa)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한 라닐 위크로마싱하(Ranil Wickremasinghe)가 대표로 있다. [본문으로]